은행에는 왜 유동비율이 없을까 - 업종이 다르면 지표가 통째로 사라지는 자리
어떤 회사의 재무 화면을 보면 특정 지표 칸이 아예 비어 있습니다. 데이터가 누락된 것이 아니라 그 업종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숫자인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그리고 빈칸을 0으로 채우면 어떤 왜곡이 일어나는지 정리했습니다.
빈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재무 지표를 나열한 화면을 보다 보면 어떤 칸이 비어 있는 경우를 만납니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은 "데이터를 아직 못 가져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빈칸에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종류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원천이 이번에 답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공시는 되어 있는데 데이터 제공처가 일시적으로 그 항목을 내려 주지 않았거나, 집계가 늦어 아직 반영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런 빈칸은 내일 다시 보면 채워져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 회사에 그 숫자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회계 구조상 계산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서, 얼마를 기다려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은행의 유동비율이 바로 이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읽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이 둘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합니다. 앞의 경우는 기다리면 되고, 뒤의 경우는 다른 지표로 대신 봐야 합니다.
은행 재무제표에는 유동자산과 유동부채라는 구분이 없다
유동비율은 유동자산을 유동부채로 나눈 값입니다. 1년 안에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 1년 안에 갚아야 할 빚보다 얼마나 많은지를 보는 지표입니다. 제조업이나 유통업처럼 재고와 매출채권이 돌아가는 회사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계산입니다.
그런데 은행의 재무상태표를 펼치면 유동자산이라는 항목도, 유동부채라는 항목도 찾을 수 없습니다. 회계 기준이 금융회사에 대해서는 자산과 부채를 1년 기준으로 가르는 대신 유동성이 높은 순서대로 늘어놓는 방식을 허용하고, 은행 대부분이 그 방식을 씁니다. 나눌 분자와 분모가 재무제표에 존재하지 않으니 유동비율이라는 숫자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은행이 정보를 감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은행업의 실제 자금 흐름은 1년이라는 칸막이로 잘라 봤을 때 의미가 생기지 않고, 유동성 순서로 늘어놓는 편이 회사의 상태를 더 정확히 보여 줍니다. 지표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럴 만한 회계적 이유가 있습니다.
보험사와 일부 지주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업 구조가 다르면 재무제표의 뼈대가 달라지고, 뼈대가 달라지면 그 위에서 계산되던 지표 하나가 통째로 사라집니다.
부채비율도 업종이 바뀌면 같은 뜻이 아니다
사라지지는 않지만 뜻이 달라지는 지표도 있습니다. 부채비율이 대표적입니다. 제조업에서 부채비율이 높다는 것은 대체로 빌린 돈이 많다는 뜻이고, 그만큼 이자 부담과 상환 압박을 안고 있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은행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고객이 맡긴 예금은 회계상 은행의 부채입니다. 예금을 많이 받아 대출로 굴리는 것이 은행의 본업이므로, 은행의 부채비율은 사업을 얼마나 크게 하고 있는지를 반영합니다. 제조업의 잣대를 그대로 대면 정상적으로 영업하는 은행일수록 위험해 보이는 착시가 생깁니다.
같은 이유로 금융업의 건전성은 부채비율이 아니라 자기자본비율처럼 업종 전용 지표로 감독됩니다. 어떤 숫자를 볼 것인지가 업종에 따라 통째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업종의 부채비율을 나란히 놓고 크기만 비교하는 것은, 단위가 다른 두 수를 같은 자로 재는 것과 비슷합니다. 숫자는 계산되지만 그 비교가 의미하는 바가 없습니다.
빈칸을 0으로 채우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
문제는 이 빈칸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생깁니다. 데이터를 다루는 프로그램은 값이 없으면 계산이 멈추기 때문에, 빈 자리를 무언가로 채우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가장 흔한 선택이 0입니다.
이것이 왜 위험한지는 방향을 생각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부채비율은 낮을수록 좋은 지표입니다. 그러니 유동비율과 부채비율이 없는 은행의 빈칸에 0을 적어 넣으면, 그 은행은 빚이 전혀 없는 회사로 채점됩니다. 재무 안정성 점수가 만점에 가깝게 나옵니다. 원천이 침묵했다는 사실 하나가 최고 점수로 둔갑하는 것입니다.
반대 방향의 사고도 일어납니다. ROE는 순이익을 자기자본으로 나눈 값인데, 자사주를 오랫동안 대규모로 사들인 회사는 회계상 자기자본이 마이너스가 되기도 합니다. 분모가 음수가 되면 ROE는 해석이 불가능해지고, 데이터 제공처는 아예 값을 주지 않습니다. 이 빈칸에 0을 적으면 이익을 잘 내는 회사가 수익성 최하점을 받습니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왜곡의 원인이 회사의 실제 상태가 아니라 빈칸을 메운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결과만 보는 사람은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습니다.
주픽은 빈칸을 어떻게 다루는가
주픽은 값이 없는 자리에 0을 적지 않습니다. 대신 그 지표에서 정확히 중간 점수인 50점이 나오는 값을 넣습니다. ROE에는 7퍼센트, 부채비율에는 110퍼센트, 유동비율에는 128퍼센트가 그 자리에 해당합니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판정하지 않는 지점이라서, 원천이 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등급을 위로도 아래로도 밀지 않습니다.
업종 평균이나 전체 종목의 중앙값을 대신 넣는 방법도 검토했지만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 회사는 평균만큼은 한다"라는 새로운 주장이 슬쩍 끼어들기 때문입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두는 편이 정직합니다.
예외가 하나 있습니다. 배당 지표의 0은 결측이 아니라 실측일 수 있습니다. 배당을 주지 않는 회사는 배당 공시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시가 응답했는데 배당 항목만 비어 있으면 그 0은 무배당이라는 측정 결과로 다루고, 조회 자체가 실패한 회차의 0만 결측으로 표시합니다. 같은 0이라도 앞뒤 사정에 따라 뜻이 다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화면에서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대체값이 쓰인 지표는 종목 화면에서 원래 숫자 대신 하이픈으로 표시되고, 그 아래에 왜 비었는지가 한 줄로 붙습니다. 원천이 이번에 답하지 않은 것인지, 그 회사에 애초에 없는 지표인지가 구분되어 적힙니다.
등급 카드를 펼치면 각 지표가 100점 만점에 몇 점을 받아 그 등급이 만들어졌는지도 볼 수 있습니다. 결론만 던지지 않고 결론을 만든 재료를 같이 보여 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 처리를 믿으면 안 되는 자리
중립 처리는 왜곡을 줄이는 방법이지 없애는 방법이 아닙니다. 지표 하나가 중립값으로 채워졌다면, 그 카테고리 점수는 실제로 측정된 지표가 하나 적은 상태에서 계산된 것입니다. 같은 B등급이라도 아홉 개 지표가 모두 살아 있는 종목과 두 개가 비어 있는 종목은 근거의 두께가 다릅니다.
특히 금융업 종목의 재무 안정성 점수는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유동비율이 비고 부채비율의 의미가 달라지는 업종이라, 일반 기업과 같은 잣대로 매긴 점수가 그 회사의 건전성을 그대로 대변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금융업 종목을 볼 때는 등급보다 개별 지표와 업종 전용 건전성 정보를 함께 확인하는 편이 낫습니다.
하이픈이 보인다면 그것은 오류 표시가 아니라 정보입니다.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줄 설명을 함께 읽고, 필요하면 그 지표를 대신할 다른 숫자를 찾아보는 것이 바른 사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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