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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 12배는 싼가 비싼가 - 지표를 줄 세워서 읽는 법

지표 하나만 놓고는 그 숫자가 흔한지 드문지 알 수 없습니다. 평균이 기준선이 되지 못하는 이유, 중앙값과 사분위로 위치를 읽는 법, 그리고 분포를 셀 때 무엇을 빼야 하는지를 정리했습니다.

숫자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어떤 회사의 PER이 12배라고 합시다. 싼 걸까요, 비싼 걸까요. 이 질문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12라는 숫자만으로는 그것이 흔한 값인지 드문 값인지 알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키가 175센티미터라고 하면 우리는 곧바로 감을 잡습니다. 평생 수많은 사람을 봐 왔고, 그래서 175가 어느 언저리인지 몸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PER 12배는 그런 감각이 없습니다. 비교 대상을 본 적이 없으니 위치를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표를 읽는 첫걸음은 계산식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기준선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 시장에서 이 지표가 보통 어느 값을 가지는지, 그 언저리를 알고 나서야 눈앞의 숫자가 의미를 갖습니다.

문제는 그 기준선을 어디서 구하느냐입니다. 많은 글이 특정 숫자를 기준선처럼 이야기합니다. PER은 10배 안팎, PBR은 1배, ROE는 15퍼센트 같은 식입니다. 이 숫자들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어디서 왔는지 출처가 없고 시간이 지나도 갱신되지 않습니다.

평균은 왜 기준선이 되지 못하는가

기준선을 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전 종목의 평균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무 지표에서는 이 방법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평균은 유별나게 큰 값 몇 개에 통째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봅시다. 이익이 거의 0에 가깝게 줄어든 회사가 있으면, 시가총액을 그 작은 이익으로 나눈 PER은 수백 배, 때로는 1,000배를 넘습니다. 회사가 특별히 비싸서가 아니라 나눗셈의 분모가 0에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목이 400개 중 다섯 개만 섞여 있어도 평균은 크게 들립니다. 나머지 395개가 10배 언저리에 모여 있어도 평균은 30배, 40배로 나옵니다. 그렇게 나온 평균을 기준선으로 삼으면 대부분의 종목이 평균보다 싸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부채비율도 같은 문제를 겪습니다. 자본이 거의 남지 않은 회사의 부채비율은 수천 퍼센트로 찍힙니다. 매출성장률은 반대 방향으로도 튑니다. 작년 매출이 아주 작았던 회사가 올해 조금만 늘어도 성장률은 몇백 퍼센트가 됩니다. 재무 지표는 나눗셈으로 만들어지고, 나눗셈은 분모가 작아질 때 폭주합니다.

줄을 세우면 보이는 것

평균 대신 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전 종목을 그 지표의 크기순으로 한 줄로 세운 다음, 특정 위치에 서 있는 종목의 값을 읽는 것입니다.

한가운데 서 있는 종목의 값을 중앙값이라고 부릅니다. 400개 종목을 줄 세웠다면 200번째 종목의 값입니다. 중앙값의 장점은 극단값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맨 끝에 PER 1,000배짜리 종목이 있든 없든, 한가운데 서 있는 종목은 그대로입니다. 줄의 길이가 아니라 줄의 순서만 보기 때문입니다.

한가운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줄의 4분의 1 지점과 4분의 3 지점도 함께 봅니다. 작은 쪽에서 25퍼센트 지점, 그리고 큰 쪽에서 25퍼센트 지점입니다. 이 두 값 사이에 전체의 절반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세 개의 값을 알고 나면 눈앞의 숫자를 곧바로 배치할 수 있습니다. PER 12배가 작은 쪽 25퍼센트 지점보다 낮다면 이 시장에서 낮은 축에 속하는 것이고, 큰 쪽 25퍼센트 지점을 넘었다면 높은 축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 사이라면 흔한 값입니다.

폭을 함께 봐야 하는 이유

중앙값이 같아도 지표마다 성격은 전혀 다릅니다. 같은 한가운데를 가진 두 지표가 있어도, 하나는 대부분의 종목이 그 근처에 촘촘히 몰려 있고 다른 하나는 넓게 흩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촘촘한 지표에서는 한가운데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드문 값이 됩니다. 흩어진 지표에서는 꽤 벗어나도 여전히 흔한 축입니다. 그래서 4분의 1 지점과 4분의 3 지점 사이의 간격, 즉 폭을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작은 값과 가장 큰 값도 참고가 됩니다. 다만 이 두 값은 성격이 다릅니다. 중앙값이나 사분위는 여러 종목이 함께 만드는 숫자지만, 최댓값은 딱 한 종목이 혼자 만든 숫자입니다. 그 한 종목에 회계상 특수한 사정이 있으면 최댓값은 통째로 흔들립니다. 폭이 이만큼 넓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용도로만 쓰는 편이 안전합니다.

국내와 해외를 한 줄에 세우지 않는 이유

주픽은 국내 종목과 해외 종목의 분포를 따로 냅니다. 두 시장을 한 줄에 세우면 어느 쪽도 제대로 읽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가총액은 이유가 명백합니다. 통화가 다릅니다. 원화와 달러로 표시된 값을 한 줄에 세우는 것은 센티미터와 인치를 섞어 키 순서를 매기는 것과 같습니다.

비율 지표는 단위가 같아서 한 줄에 세울 수는 있지만, 그래도 나누는 편이 낫습니다. 두 시장은 회계 기준이 다르고, 상장된 업종 구성이 다르고, 배당 관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배당 문화가 오래 자리 잡은 시장과 그렇지 않은 시장의 배당수익률을 섞으면 두 개의 봉우리가 하나로 뭉개져, 어느 쪽 종목을 보든 위치를 잘못 읽게 됩니다.

재무 자료의 기준 시점도 다릅니다. 국내 종목은 연간 보고서 기준이고 해외 종목은 최근 분기 기준입니다. 같은 이름의 지표라도 재는 기간이 다르므로, 나란히 놓기 전에 이 차이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채워 넣은 값은 세지 않는다

분포를 낼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데이터에 섞인 대체값입니다. 이건 주픽 내부 사정이지만, 어떤 서비스의 통계를 보든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라 밝혀 둡니다.

주픽의 등급 계산기는 아홉 개 지표에 반드시 숫자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원천 자료에 그 값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시가 아예 없거나, 그날 자료 제공처가 응답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때 계산기를 그냥 세워 버리면 그 종목은 등급 자체를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빈자리를 중립값으로 채웁니다. 점수로 환산했을 때 정확히 한가운데가 되는 값이라, 그 종목이 상도 벌도 받지 않게 하는 장치입니다.

문제는 이 값들이 화면에서 실제 측정값과 똑같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그대로 세어 분포를 만들면 우리가 채워 넣은 값 자리에 없던 봉우리가 생기고, 그 봉우리가 시장 통계인 것처럼 보입니다. 심하면 중앙값 자체가 우리가 지어낸 숫자가 됩니다.

그래서 주픽은 어느 칸이 채워 넣은 값인지를 종목마다 따로 기록해 두고, 분포를 셀 때 그 값들을 표본에서 뺍니다. 지표 페이지의 분포표 아래에 몇 개를 뺐는지 적어 두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표본이 어디까지인지 밝히지 않은 통계는 검증할 수가 없습니다.

이 표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분포표가 답해 주는 질문은 하나뿐입니다. 이 숫자가 지금 이 시장에서 흔한 값인가, 드문 값인가. 그것으로 충분히 유용하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드문 값이라는 사실은 좋다는 뜻도 나쁘다는 뜻도 아닙니다. PER이 낮은 쪽 끝에 있는 종목은 시장이 그 회사의 이익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고 있어서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낮은 PER이 저평가가 아니라 경고인 경우를 밸류 트랩이라고 부릅니다.

업종을 건너뛴 비교라는 한계도 분명합니다. 분포는 시장 전체를 한 줄에 세운 것이라, 업종별 구조 차이를 지웁니다. 설비 투자가 큰 업종의 부채비율이 높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자본이 적게 드는 업종의 ROE가 높은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시장 전체에서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에는 같은 업종끼리 다시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지표 하나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수익성이 좋아 보여도 빚으로 만든 이익일 수 있고, 배당이 후해 보여도 이익을 넘겨 지급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분포표는 여러 지표를 각각 제자리에 놓아 보라고 있는 것이지, 하나의 지표를 결정적인 근거로 삼으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 내용은 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자문이 아닙니다. 주픽은 특정 종목의 매매를 권유하지 않고 미래의 주가를 예측하지 않으며, 분포상 어느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어떤 형태의 추천도 아닙니다. 투자의 최종 판단과 책임은 이용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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